2024년 6월 19일(UTC-4), 첫 미국에 왔던 순간.
그로부터 약 2년 후 2026년 6월 22일(UTC-7), 다시 미국으로 왔다.
이 글에서부터 총 3번에 걸쳐 그 동안의 서사에 대해 기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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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번째, 2달 간의 미국 생활! |
기회를 발견하다
미국의 첫번째 모습을 뉴욕, LA에서 느껴서일까?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 한 켠에 남아있다. LA에서 조금만 나가면 나오는 사막이나 그랜드 캐니언을 갔을 때 느꼈던 자연의 장엄함, 라스베가스의 스피어에서 본 기술의 향연 / 한편에는 자정에 뉴욕-LA 비행기 결항으로 필라델피아까지 대체 항공편을 타러 새벽 이동을 했던 날, 라스베가스에서 LA로 이동 중 사막 한가운데서 FlixBus가 멈춰서 밤새 세상에 온갖 욕을 들은 날 등등 바람 잘 날이 없었던 60일이었다.
아마 내 생에 다시는 이렇게까지 많은 위기를 겪고, 여행을 다닐 일이 없을 것이다.
명목적으로는 미국 대학에 공부하러 간거지만... 학문적인(?) 공부보단 우리나라 바깥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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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비행기 결항 사건... / 2과목 밖에 안들어서 그렇지 수업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
그런데 딱 하나,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도 나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름 ai & tech enthusiast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종주국, 혁신의 중심이라는 나라에서 두 달을 보냈는데 정작 기술과 혁신을 느낀 순간은 라스베가스 스피어 하나뿐이었다(물론 그 임팩트는 상당히 컸다). 자연도 봤고 사람도 만났고 고생도 실컷 했는데, 정작 내가 제일 궁금했던 미국은 못 보고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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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K 디스플레이와 음향이 주는 압도적인 몰입감 |
아무튼 그렇게 미국이란 나라를 (절반쯤) 제대로 느꼈던 24년을 지나, 2년 후 다시 나에게 기회가 찾아 왔다.
바로 42경산에서 주관하는 글로벌 프로그램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도 자료로 대체)
왜 42였나
42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프랑스에서 시작된 개발자 교육기관이다. 강사도, 교재도, 학비도 없다. 대신 과제와 동료가 있다. 서로의 코드를 평가하고, 막히면 옆자리 사람에게 묻는다. 국내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로 소프트웨어 교육 혁신을 위해 추진되고 있고, 그만큼 지원도 전폭적이다.
내가 42를 택한 이유는 조금 개인적이다.
대학을 다니며 창업 활동을 하는 동안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계속 느꼈다. 강의실에서 배우는 것과 실제로 제품을 굴리는 데 필요한 것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군 이슈도 있겠다 올해는 휴학을 결심하고 창업에 집중하기로 했는데, 다음 스탭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프로덕트를 제대로 만드는 일이었다. 휘황찬란한 계획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프로덕트. 이를 위해 기술적 역량을 갖추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42가 눈에 들어왔다. 커리큘럼이 정해진 시간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철저히 본인이 하기 나름인 구조. 이게 가장 컸다. 창업과 병행이 가능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프로덕트를 직접 개발하고, 협력하는 역량을 내재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2026년 1월, 피신(La Piscine)이라는 이름의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이름 그대로 물에 던져놓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방식이다. C언어와 norminette에 시달리며 한 달을 보냈다.
낮에는 42 과제, 밤에는 창업팀 개발. 그 시기의 나는 몸이 두 개였으면 했다.
지원할 것인가
42에 와서 글로벌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지원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4월 말, 앱 출시가 코앞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무엇보다 이 질문이 걸렸다. "지금 당장 팀과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
프로그램 커리큘럼을 보니 기업가 정신의 기초에 해당하는 내용이 많았다. 아이데이션은 이미 끝냈고 제품은 출시 직전인 입장에서는 솔직히 의구심이 들었다. (이 의구심은 프로그램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얘기는 다음 글에서.)
그럼에도 지원한 건 24년의 그 아쉬움 때문이었다. 스피어 같은 체험 대신, 진짜 기술과 혁신이 굴러가는 현장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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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주차,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
3분
그렇게 지원 후 5월 11일, 영어 3분 발표 면접이었다.
3분은 생각보다 짧다. 내가 지금껏 해온 발표는 대부분 5~10분 즈음이었기에 준비한 분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하고 싶은 말만 남겼다. 우리 제품 '슬루스'가 무엇인지, 그리고 2026년 1월까지 내가 해온 것들. 그 다음에 글로벌 시장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다.
이건 억지로 만들어낸 명분이 아니었다. 추리 시장은 국내보다 해외가 훨씬 발달해 있고, 시장 자체가 덕후 중심으로 굴러간다. 그런 시장이라면 자연히 밖을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합격. 솔직히 아무런 가산점이 없어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내가 그동안 해온 창업 활동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다.
공백을 만들지 않는 법
나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 달을 비워도 팀이 굴러가는가.
당시 나는 스스로를 팀의 린치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10명이 채 안되는 소규모 팀에서, 각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누군가의 공백은 팀의 마일스톤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답은 말이 아니라 결과로 만들어야 했다.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Claude MAX를 결제하고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버스에서는 remote control로 구현을 돌리고, sub agent로 계획-구현-리뷰 파이프라인을 반복시키고, 자기 전에 loop를 걸어놓고 일어나자마자 리뷰부터 했다. 피신 때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고 일기에 썼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유일한 취미였던 자기 전 넷플릭스 보기 마저 깨버린 말도 안되는 워커홀릭이었고,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나를 더 열심히 일하게 했다 / 이때 Claude MAX를 끊은게 최고의 투자였다고 생각한다)
| 다시 보니 미쳐버린 커밋 기록. 진한 색은 최소 커밋 50개다 |
그렇게 밀도 있게 출시를 마무리했고, 6월 초 앱은 스토어에 올라갔다.
미국에 와서도 작업은 계속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주최 측에서 프로덕트 개발용 Claude 비용을 지원해줘서, 여기 있는 동안 팀에 더 보탬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됐다(Claude MAX 버프!). 공백을 걱정했는데 원동력도 얻고 회의 등 기존 팀의 협력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시차가 16시간 차이라 한국 기준 밤 10시, 시애틀 기준 아침 6시 회의라... 어려운 일정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6월 22일
제품은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이제 누구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무 답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상태로 나는 시애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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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애틀 도착 후 앞으로 2달 간 머물 기숙사로 향하는 길 |




